2020년 개봉한 영화 '내가 죽던 날'은 여성 감독 박지완이 연출한 섬세한 감정 드라마로, 실종된 소녀와 그녀를 찾아 나선 형사의 이야기를 통해 상실과 회복, 여성 간 연대라는 묵직한 주제를 풀어냅니다. 이 글에서는 영화의 주요 줄거리와 인물의 감정선, 그리고 2024년 현재 다시금 조명되는 이유에 대해 살펴봅니다.
실종된 소녀, 그리고 무너진 형사
‘내가 죽던 날’은 비 오는 밤, 절벽 위 휠체어만 남긴 채 실종된 소녀 세진(노정의)의 사건에서 시작됩니다. 세진은 청각장애를 가진 고등학생으로, 아버지의 범죄와 가정 붕괴로 보호시설에 맡겨졌던 상처 많은 인물입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는 섬의 절벽 위였고, 경찰은 자살로 추정하지만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 수사는 미궁에 빠집니다. 이 사건을 맡은 형사 현수(김혜수)는 복직을 앞두고 있지만, 이혼과 딸의 양육권 문제 등 개인적인 삶이 붕괴 직전에 놓여 있습니다. 세진의 실종 사건은 단순한 실종이 아니라, 현수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이 됩니다. 형사는 소녀가 선택했을 가능성과 남겨진 흔적을 통해 그녀가 정말 죽음을 택한 것인지, 아니면 무엇인가를 피하려 한 것인지 천천히 추적합니다. 영화는 추리나 액션보다는 인물의 심리 묘사에 집중합니다. 현수는 세진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점차 그녀의 내면을 이해하게 되고, 이 과정은 곧 자신을 마주보는 여정이 됩니다. 극 중에는 “그날, 나는 죽었지만 다시 태어났다”는 의미심장한 대사가 반복되며, 실종이 끝이 아닌 시작임을 암시합니다.
여성 간 연대와 치유의 메시지
이 영화의 핵심은 여성 간 연대입니다. 세진과 현수, 그리고 또 한 명의 중요한 인물인 이웃 오미숙(이정은)은 각기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상처받은 여성이란 공통점을 가집니다. 오미숙은 말수가 적고 괴팍해 보이는 이웃이지만, 세진에게 중요한 피난처였고, 현수에게도 서서히 마음을 열게 됩니다. 현수는 미숙과의 대화를 통해 세진이 죽음을 연출했을 가능성을 감지합니다. 영화는 명확한 단서를 내보이지 않으면서도, 인물의 감정과 행동을 통해 서서히 진실에 다가가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건의 실체보다도 그 과정을 통해 서로가 치유되고 성장한다는 점입니다. 여성 캐릭터들은 더 이상 희생자나 주변 인물이 아닙니다. 이 영화는 남성 중심적인 전통 서사 구조에서 벗어나, 여성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배치하며,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듭니다. 특히 형사라는 직업적 권위가 무너진 후, 한 여성으로서 현수가 세진과 미숙을 이해하고, 또 자신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은 강한 여운을 남깁니다.
2024년 재조명, 그리고 우리가 이 영화를 기억해야 할 이유
‘내가 죽던 날’은 개봉 당시에는 대중적인 흥행을 거두지 못했지만, 2024년 현재 OTT 플랫폼과 SNS에서 조용한 반향을 일으키며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특히 여성 서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지금, 이 영화는 더욱 의미 있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영화는 큰 사건이나 극적인 반전 없이도, 섬세하고 조용한 감정 묘사만으로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이는 대규모 스릴러나 자극적인 전개에 익숙해진 관객에게 새로운 영화적 경험을 제공합니다. 세진의 실종은 단지 한 인물의 소멸이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린 감정, 관계, 신뢰를 다시 회복해가는 은유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한, 영화는 “죽음”이라는 소재를 치유와 재생의 메타포로 전환시키며, 상처 입은 이들이 다시 살아가는 방법을 조명합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감정 노동과 인간관계에 지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줍니다. 결국 ‘내가 죽던 날’은 스스로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조용한 성장 영화이자, 오늘날 우리가 더 많이 나누고 들어야 할 이야기입니다.
‘내가 죽던 날’은 섬세하고 내밀한 감정으로 우리를 흔드는 영화입니다. 실종사건이라는 틀 안에 인간관계의 복잡함과 여성의 상처, 그리고 연대의 가능성을 담아낸 이 작품은,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반드시 다시 봐야 할 영화 중 하나입니다. 자극적이지 않지만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이 영화는, 누군가에게는 ‘다시 살아가도 좋다’는 메시지가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