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자산어보" 리뷰
흑백으로 그린 실학자의 바다 이야기

영화 소개
출연진
설경구 - 정약전 역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
변요한 - 창대 역 (흑산도에서 정약전을 돕는 어부)
이정은 - 가거댁 역 (흑산도 주민)
민도희 - 복례 역
차순배 - 풍헌 역
류승룡 - 정약용 역 (정약전의 동생)
조우진 - 별장 역
영화 정보 및 배경
자산어보는 이준익 감독의 14번째 영화이자 8번째 사극 작품입니다. 독특하게도 영화는 흑백으로 촬영되었으며, 조선 후기 흑산도(당시 '자산')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물고기 백과사전인 '자산어보'를 저술한 실학자 정약전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실제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학 서적으로, 1814년에 완성되어 총 226종의 해양생물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영화는 신유박해 이후 천주교 신자였던 정약전이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된 1801년부터 시작해, 그가 현지 어부 창대와 만나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두 사람이 지식을 교환하며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2019년 8월 19일부터 10월 31일까지 약 2개월간의 촬영을 거쳐 제작되었으며, 제57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줄거리 요약
1801년,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순조가 즉위한 후 일어난 신유박해로 인해, 서학(천주교)을 믿던 정약전(설경구)은 흑산도로 유배를 오게 됩니다. 유배 초기, 그는 조선의 사대부로서의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 하며 섬사람들과 거리를 두려 합니다. 하지만 정약전은 점차 흑산도의 바다와 생물들에 관심을 갖게 되고, 물고기에 관한 책을 쓰기로 결심합니다.
정약전은 물고기에 관한 지식을 얻기 위해 바다에 나가야 하지만, 수영을 할 줄 모르는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섬에서 글을 배우고 싶어하는 청년 어부 창대(변요한)를 만납니다. 창대는 성리학을 공부해 과거에 합격해 출세하기를 꿈꾸는 인물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거래를 시작합니다. 정약전은 창대에게 글을 가르치고, 창대는 정약전에게 물고기에 관한 지식을 알려주기로 합니다.
시간이 흐르며 정약전은 창대의 도움으로 다양한 해양생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기록합니다. 동시에 창대는 정약전의 가르침으로 학문의 깊이를 더해가며 과거 시험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정약전은 창대가 추구하는 성리학적 가치관에 의문을 품게 되고, 실용적인 지식의 중요성을 창대에게 일깨우려 합니다. 이에 창대는 혼란을 느끼면서도 스승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마침내 창대는 과거에 합격하고, 나주 목사 밑에서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가 배웠던 성리학적 이상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벼슬아치들은 백성들의 고통에 무관심했고, 부패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실망한 창대는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다시 흑산도로 돌아와 정약전과 함께 '자산어보'를 완성하는 데 헌신합니다.
영화는 정약전이 자산어보를 완성하고 세상을 떠난 후, 창대가 학문의 중요성과 실용적 지식의 가치를 깨닫고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모습으로 마무리됩니다. 흑백 화면으로 펼쳐지는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컬러로 전환되며, 현재의 아름다운 흑산도 바다를 보여줍니다. 이는 정약전과 창대가 남긴 지식과 가치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감상 포인트
연출
이준익 감독은 '자산어보'를 흑백 필름으로 제작해 시대극의 미학적 아름다움을 극대화했습니다. 흑백 영상은 18세기 조선의 분위기를 더욱 생생하게 전달하며, 화면 구성에서도 한국의 전통적인 수묵화 같은 느낌을 담아냈습니다. 특히 바다와 섬의 풍경을 담은 장면들은 영화적 여백의 미를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시적인 감동을 전달합니다.
또한 이준익 감독 특유의 담백한 연출로 복잡한 사상적 갈등을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게 표현했습니다. 인물들의 대화와 감정을 밀도 있게 그려내면서도, 지루함 없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갑니다.
연기
설경구는 유배지에서 학문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발견해가는 정약전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했습니다. 특히 그의 눈빛과 표정 연기는 말보다 더 많은 감정을 전달합니다. 처음에는 고집스럽고 완고한 선비의 모습에서 점차 실용적인 학자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표현했습니다.
변요한은 순수한 열정으로 학문을 배우고자 하는 창대 역할을 맡아 젊은 영혼의 순수함과 갈등을 생생하게 연기했습니다. 성리학에 대한 맹신에서 비롯된 이상주의와 현실의 괴리 속에서 방황하는 모습이 특히 인상적입니다. 설경구와 변요한의 연기 호흡은 스승과 제자, 또 인생의 동반자로 발전해가는 두 인물의 관계를 진실되게 그려냈습니다.
조연으로 등장한 이정은과 조우진은 짧지만 강렬한 존재감으로 극에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특히 조우진이 연기한 별장 캐릭터는 전형적인 관리 역할을 예상치 못한 매력으로 표현해 관객들에게 신선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영상미
'자산어보'의 흑백 화면은 단순한 스타일의 선택이 아니라 영화의 주제와 정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구도와 명암의 조화는 조선 시대 학자의 세계관과 어우러지며 시각적 아름다움을 선사합니다. 특히 바다와 섬의 풍경, 다양한 해양생물을 담은 장면들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감상자의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또한 영화 마지막에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컬러 장면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며, 정약전과 창대의 노력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러한 시각적 전환은 영화의 메시지를 강조하는 효과적인 장치로 작용합니다.
각본
김세겸 작가의 각본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상상력을 발휘해 창대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실제 자산어보 서문에는 장 덕순 창대라는 인물이 언급되지만, 영화는 이를 창조적으로 재해석해 스승과 제자의 관계, 이상과 현실의 충돌, 지식의 가치 등 다양한 주제를 탐구합니다.
또한 성리학과 실학이라는 사상적 갈등을 학술적 논쟁이 아닌 인간적 교감과 성장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방식이 인상적입니다. 무엇보다 관객들이 어려울 수 있는 역사적, 철학적 내용을 감동적인 인간 드라마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만합니다.
인상 깊은 장면과 대사
"책에 있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자연을 관찰하고 경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정약전이 창대에게 실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 대사는 영화의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창대가 물고기를 잡아 정약전에게 가져오고, 두 사람이 함께 물고기의 특성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장면들은 지식 습득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줍니다.
또한 창대가 벼슬을 얻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실망한 후 자신의 이름표를 불에 태우는 장면은 신분과 출세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순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영화는 단순한 역사극을 넘어 보편적인 인간의 고뇌와 성장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영화 OST 음악
'자산어보'의 음악은 방준석 음악감독이 담당했으며, 조감독으로 현서원이 참여했습니다. OST에는 다양한 트랙이 수록되어 있으며, 특히 주목할 만한 곡으로는 '자산어보 Opening', '잡아 들이세요', '정약종', '법정진술' 등이 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노래는 최백호의 '바다 끝'입니다. 이 곡은 최백호의 데뷔 40주년 앨범 '불혹'에 수록된 곡으로, 영화의 분위기와 완벽하게 어우러집니다. 서정적인 멜로디와 가사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은 창대의 열망과 정약전의 지혜를 담아내며, 영화의 정서적 깊이를 더합니다.
또한 전통적인 한국 악기와 현대적인 음향이 조화를 이루는 배경음악들은 흑백 화면과 어우러져 영화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조성합니다. 특히 바다 장면에서의 음악은 자연의 웅장함과 고요함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장점과 단점
장점
- 설경구와 변요한의 뛰어난 연기 호흡이 영화의 감동을 더함
- 흑백 영상미가 조선 시대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표현
- 성리학과 실학의 사상적 대립을 인간적 관계로 풀어낸 섬세한 각본
- 이준익 감독 특유의 담백한 연출로 잔잔하지만 깊은 감동을 전달
- 한국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현대적 시각으로 재해석한 점
단점
- 다소 느린 전개로 인해 지루함을 느낄 수 있는 관객이 있을 수 있음
- 흑백 영상이 일부 관객들에게는 진입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음
- 역사적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한 부분이 있어 혼란을 줄 수 있음
- 철학적, 사상적 내용이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음
- 상업영화로서의 극적 요소가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는 관객도 있음
개인 취향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은 영화의 전반적인 속도와 흑백 화면입니다. 빠른 전개와 화려한 시각적 효과를 선호하는 관객에게는 '자산어보'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영화의 단점이라기보다는 작품의 특성에 가깝습니다.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이야기를 선호하는 관객들에게는 오히려 큰 매력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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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 및 별점
'자산어보'는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이야기를 인간적 공감대와 철학적 깊이로 승화시킨 수작입니다. 이준익 감독의 섬세한 연출력, 설경구와 변요한의 뛰어난 연기, 그리고 흑백 화면이 주는 독특한 미학적 경험은 영화의 가치를 높여줍니다. 단순한 역사적 인물의 삶을 넘어, 지식과 교육의 진정한 의미, 신분과 계급을 초월한 인간적 교류, 그리고 실용적 지식의 가치를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다소 느린 전개와 철학적 내용으로 인해 모든 관객에게 쉽게 다가가지는 못할 수 있지만, 사색적인 영화를 즐기는 관객, 한국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있는 관객, 그리고 연기력 위주의 작품을 선호하는 관객에게 특히 추천합니다. 흑백 화면에서 펼쳐지는 인간적 드라마는 보는 이의 마음에 오래 남는 여운을 선사할 것입니다.